후난성 융싱 현의 백수 고촌
백수촌은 황씨 종친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다. 개기공 황몽환은 원래 상청촌 출신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의 집 소가 항상 30리 밖 백수 나무 아래 산탕으로 빠져나갔는데, 황몽환이 이를 길조로 여겨 명나라 정덕 연간에 백수 아래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는 부지런히 농사지으며 학문을 닦아 세 아들을 키워 세 집안의 자손을 이루었고, 이후 산을 등지고 집을 짓고 물가에 마을을 이루어 공식적으로 백수촌이라 명명했다.
황몽환은 상청 황씨 12대 후손으로, 현재 백수 황씨는 몽공 이후로 19대까지 이어져 500여 가구, 2000여 명이 살고 있다. 이 500년 동안 백수 황씨 가문은 인구가 번성하고 재물이 넉넉해져 강좌 일대에서 명성을 떨쳤다.
마을 앞에는 작은 시내가 흘러 구산강으로 합류하는데, 이를 "금대환포"라 부른다. 마을에는 세 집안의 대문만 남향으로 열려 있고, 다른 건물들은 후령산을 등지고 서쪽을 바라보며 동쪽을 향해 지어졌다. 지형에 따라 남북으로 확장되었는데, 북쪽은 수탉과 뱀 모양을, 남쪽은 거북이 모양을, 동쪽 정면은 살찐 돼지가 문을 헤치는 모양을 닮았다. 후령산에는 울창한 숲과 호랑이 바위, 신인의 발자국, 동굴 등이 있다. 마을에는 6개의 고색이 있는 우물이 있는데, 큰 청석으로 네모난 입구를 만들었으며 물이 끊임없이 흐른다. 고촌에는 청말 민초의 고택 94채가 남아 있으며, 총 건축 면적은 22,969㎡이다. 고촌은 공청, 학당, 민가, 다리와 우물, 고색의 역도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골목길, 시내, 건물, 샘물 우물 등이 조밀하고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청회색 벽돌과 기와로 된 소박하고 우아한 색조의 건물들, 말두벽의 중첩된 처마, 창문의 상인방, 들보 장식, 채색, 벽돌 조각, 석조, 창호 등이 다채롭게 펼쳐져 있다. 고택의 벽돌 조각은 대부분 양각으로 "부귀쌍전", "만대흥륭", "천사만복" 등의 내용이 새겨져 있지만, "인문울기"라는 음각 벽돌 조각도 하나 있다. 청사 내부의 석주, 기초석, 천정의 석조, 월량의 목조, 편액 등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백수촌 고택의 일부 특수 기술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고 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최고의 장인이라도 하루에 최대 7~8개의 벽돌만 놓을 수 있었고, 청벽돌은 물로 씻어 갈아낸 후 주전자로 회반죽을 부어 서로 맞물리게 했기 때문에 벽에 못을 박을 수 없었다고 한다. 시간, 재료, 노력이 많이 들어 당시 부유한 가문의 호화로움과 세심함을 엿볼 수 있다. 백수촌은 예로부터 문무를 숭상하여 역대 인재가 배출되었다. 족보에 따르면 마을에서 홍수전을 따르던 명궁이 한 명 있었는데, 그의 표창과 철사장 공력은 대단했다고 한다. 청말에도 수재가 배출되었고, 복건성에서 무관을 열고 신사공부를 가르친 무사도 몇 명 있었다. 백수촌 사람들은 상업에도 능해 유마시의 번영은 백수촌 사람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현재 시장에는 백수촌 출신이 거의 100가구 정도 된다.
1920년대부터 백수촌에는 극단이 생겨 30여 개의 레퍼토리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화등극, 화고극, 상극을 공연해 주변 마을에서 유명했다. 현재 극단 멤버는 31명으로, 가장 나이 많은 멤버는 80대이며, 70대 장로 6명, 10세 정도의 어린이 2명, 나머지는 중장년층이다. 극단은 질서정연하게 전승되고 있다. 다행히도 12벌의 고전 의상이 보존되어 현재는 골동품 보물이 되었는데, 한 벌의 고전 용포는 수십만 원의 가치가 있다. 명절이면 극단은 항상 공연을 하는데, 자주 공연되는 레퍼토리로는 <진향련>, <십오관>, <어서루>, <곽자의상수>, <천관사복> 등이 있다. 제5차 중국 전통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