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아오도 장군부(南澳島將軍府)의 정식 명칭은 "복건광동 난아오 장군진(南澳島將軍鎭)"입니다. 전국 유일의 섬 장군부입니다. 산터우시 난아오현 선아오진(深澳縣) 난아오시 터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으며, 높은 역사 문화적 가치와 관광 가치를 지니고 있어 방문할 가치가 있는 관광 명소입니다.
다음은 난아오도 장군부(南澳島將軍府)의 주요 명소를 소개합니다.
역사적 의의
- 군사적 거점의 증거: 명나라 만력 3년(1575년) 칙령으로 "난아오 부장군(南澳副將軍)을 설치하여 장초(張超) 등지를 수비하도록 한 이후, 200여 명의 부장군과 장군들이 이곳에서 나라를 수호하고 적의 침략에 저항했습니다. 이곳은 난아오의 항일과 나라를 수호하는 영광스러운 역사를 증언하는 곳입니다.
- 대만과의 관계: 난아오다오는 광둥, 푸젠, 대만의 교통 요충지에 위치해 있습니다. 광둥에서 대만과 가장 가까운 곳이며, 해상 실크로드의 중요한 거점이기도 하고, 대만 사람들의 고향으로도 유명합니다. 명나라 만력 4년(1576년)에 난아오진을 건설하고 장군부(將軍府)를 설치하여 푸젠 남부와 광둥 동부의 수군을 관리했습니다. 이후 청나라 말기까지 대만과 펑후를 교대로 수비했습니다. 수군은 대만의 반란을 진압하고 일본군에 저항하여 대만을 수호하기 위해 여러 차례 대만에 파견되었습니다. 정화룡, 정성공과 그의 아들, 유영복도 이곳에 군대를 주둔시켰습니다.
문화유적 및 사적
- 모병수와 검열석: 장군부 밖에 있는 큰 반얀나무는 정성공이 이곳에서 병사를 모집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나무는 "정승공의 모병수(題兵政木)"라고 불립니다. 남오현의 고목과 명목 조사에 따르면 높이 18m, 수관 면적 580m², 가슴둘레 17.27m로 광둥성에서 가장 두꺼운 고반얀나무입니다. 나무 아래에는 "검열석(檢熟石)"이 있습니다. 정승공이 남오에서 군사를 모병할 때 이 돌로 병사들을 검열하고 젊고 강한 사람들을 선발하여 군에 입대시켜 중추 역할을 하게 했다고 전해집니다.
- 명청 시대의 고대 대포: 장군궁 앞에는 8,000근과 6,000근의 대포 두 문이 남아 있습니다. 대포에 새겨진 명문에 따르면 청나라 도광 20년(1840년)에 주조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두 대포는 원래 각각 차오랴오웨이(曹嶽威)와 선아오(沈澳) 동문 밖에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1984년에 이곳으로 옮겨졌습니다. 이 대포들은 아편 전쟁 직전에 해안 방어를 중시했던 국민 영웅 린쩌쉬(林徒徐)와 애국 장군 덩팅전(鄧庭珍)이 주조한 대포의 잔해입니다.
- 고비명: 난아오에는 오른쪽 안뜰 벽에 역대 왕조의 고비 23개가 상감되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중국 최초의 항구 조례와 조세 비로, 중요한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 복건-광동 경계비: 장군부(將軍府)는 명청 시대 광동성과 복건성의 경계에 위치했습니다. 당시 장군부 앞의 안내가(顧進街)는 경계선이었습니다. 거리에는 "푸젠-광둥 경계", "좌진 경계지", "우진 경계지"라는 문구가 새겨진 비석이 군부대 경계를 상징했습니다. 일부 비석은 소실되었지만, 남아있는 "우진 경계지"는 두 성(省)이 공동으로 관리했던 난아오진과 그 경계에 의해 통치되었던 난아오시의 전설적인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건축 양식
- 명청 양식으로 재건: 장군저는 이후 대지진으로 파괴되어 원래 모습의 대부분이 사라졌습니다. 난아오 현 당위원회와 현 정부는 고대 건축 전문가에게 명청 양식으로 재설계 및 재건을 의뢰했습니다. 본관은 정좌, 양익, 정좌, 문간, 회랑 2개, 장군저, 종루, 고루, 동문, 서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고풍스럽고 당시의 역사적 양식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 청렴교육기지: 난아오 현은 2012년 7월 장군관을 중심으로 반부패 교육기지를 건립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 기지는 해안방위건설, 국경방위, 민생, 교육, 빈곤퇴치, 재난구호 등 난아오 장군들의 뛰어난 업적을 기리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